• 최종편집 2024-04-08(월)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문화 검색결과

  • 국악가수, 그 신선함 A gugak singer delivering a fresh sound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난 노래라는 뜻의 민요와 일제 강점기 시절 형성된 대중 가요 형식의 노래인 트로트. 이 두 장르를 융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사람이 있다. 이번주 주간인물이 만나본 국악 트로트 가수 정소라와 특별한 만남을 가져보았다._이효정 ­­기자 Folk music refers to music that was created by the people over time, while trot is a popular music genre that emerged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re is someone who has pioneered a brand new music genre by combining these two types of music. It's the gugak trot singer, Jeong So-ra, who was interviewed for this week&s feature on Weekly People._Lee Hyo-jeong 집에 있는 전축을 통해 유행곡을 들으며 살았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몸져 눕게 되면서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늘 가슴 속에선 가수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신월동을 지나고 있을 때 국악 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필름처럼 지나온 세월들이 순식간에 떠오르고 지나갔다. 한복을 좋아하던 나, 노래를 곧잘 부르던 나, 국악을 좋아하던 나……. 트로트는 힘든 삶을 노래로 표현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국악과 접목시켜보았다. 한(恨)이 서린 국악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고 트로트는 관객들에게 흥겨움을 불러일으켰다. I had spent my younger years playing the hit records on the LP player at home. When my parents fell ill, I had no choice, but to start working to provide for my family. Still, I retained in my heart the longtime aspirations to become a singer. Then, one day, I was walking in Sinwol-dong, Seoul when a gugak academy caught my eye. At that moment, memories from the past & how I dearly loved hanbok, how I loved to sing, how I loved gugak - flashed before my eyes. Trot was a great way to express my hardships in life, but in a limited way. So I decided to incorporate it with gugak. Gugak, which conveys the feelings of han (roughly translated to sorrow or resentment), resonated with the audiences, while trot excited them. 기회가 왔다. Then an opportunity knocked at my door. 국악으로 입소문이 났다. 소홀했던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아이가 예중에 갈 수 있도록 노경미 선생님과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했고 나는 우울증에 빠졌다. 아이 진학도 포기한 체 자리에 누워버렸다. 무대에 다시 오르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야위어 9개월을 정신과약으로 버티며 사경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무용가 김정희 선생님의 제안으로 아이와 함께 미국 동부 버지니아 공연에 나가게 되었다. 10살의 아이는 청춘가를 불렀고 관중을 휩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희망을 얻었다. 귀국 후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봉사도 다니면서 열심히 살았으며 그렇게 CD 제작의 기회가 왔으나 기획사의 두 번의 실패로 무산되었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가수 출신의 오영산 작곡가님을 만나 실패의 경험과 위로를 받았다. 오영산 선생님께서 이왕 CD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름 석자로 작사하여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셨고 그렇게 가수 정소라가 탄생하였으며 타이틀곡 ‘떠난 사람‘이 탄생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I gained fame as a gugak singer. I was able to start studying again, and an agreement was made for my child to train under Noh Gyeong-mi so that he could enroll in a middle school specializing in the arts. But I was scammed by an acquaintance, and that incident made me fall into depression. I became emaciated to a point where I couldn&t imagine myself performing on stage again. For 9 months, I tried direly to hold on to my sanity and my life, relying on psychiatric medications. Then, Then, one day, based on a suggestion from dancer Kim Jeong-hee, I took my child to perform in Virginia U.S.A. There, my 10-year-old left the crowd enraptured with his performance of “Cheongchunga (The Song of Youth).” After seeing this, I regained hope. Although I continued to suffer from financial hardships even after returning to Korea, I still worked hard, even volunteering from time to time. I was given an opportunity to record a CD, but the project fell through twice because of the record company. At a time of dejection, I found solace in singer-turned-composer Oh Young-san, who shared with me his own experiences of failures. Oh Young-san provided me with his full support, as he encouraged me to write my own lyrics and do what I needed to produce a CD. That&s how I came to be singer Jeong So-ra, and my debut song, &The Person Who Left,& was born. I&ll never forget that moment. 나의 아들 변도현 My child, Byeon Do-hyeon 아이는 어릴 때부터 끼가 충만했다. 남자 아이였기 때문에 나와 같은 길을 가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저 사람들에게 예쁨 받는 모습이 너무 예뻐 바라만 봤다. 아이는 내가 연습을 할 때 옆에서 곧잘 따라불렀다. 6살 때는 방송국에서 인기상도 받았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에게 민요와 트로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0살이 된 아이는 동부 버지니아에서 감사장까지 받았다. 나의 아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비록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시작했지만 나의 아이는 나보다 더 크고 튼튼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주겠다고 다짐했다. My child&s talent has been apparent even from a young age. But because my child was a boy, I never knew he&d walk the same path as I did. I just noticed how he was dearly loved by the crowd who listened to him. Whenever I practiced, he&d sing along next to me. When he was 6 years old, he received a popularity prize from a broadcasting station. That was when I began to teach my son folk music and trot in full swing. When he was 10, he received a certificate of appreciation from the State of Virginia. I was proud of my child, and I became resolved to help him foster his talent. As a self-taught singer, I began singing at a relatively late age, but I wanted to do my best to present my child with the best environment to nurture his talent so that he may be able to move on to a bigger world. 더 넓은 세상을 향해 Toward a bigger world 가요계에는 무명가수가 수 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일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 자리까지 온 것 만으로도 영광이고 행복하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 그리스, 뉴욕에서 공연을 하고 왔다. 한이 담긴 남도 민요부터 흥겨운 경기 민요까지 상황에 따라 부르는 곡은 다르지만 외국에 나가면 꼭 민요를 부른다.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국악 한 마당’을 보며 몇 백번씩 돌려보며 예습, 연습, 복습을 했다. 또한 대공연장에서 명창들의 공연을 어깨너머로 그들을 보며 독학으로 지금의 내가 됐노라고 자부한다. 나의 공연 모습을 보고 뉴욕에서 섭외 전화가 왔고 그 때 나에게 누구 제자냐는 질문을 해왔다. 내가 "저는 독학입니다."라고 말하자 전화가 끊겼다. 명창의 제자만 인정한다는 뜻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There are countless obscure singers in the music industry. I myself has a long way to go. However, I feel honored and take great pleasure in the fact that I&ve come this far. I performed in Italy, Greece and New York in 2016. The songs I choose to perform & from Namdo folk music that conveys han to the upbeat Gyeonggi folk music & depend on the situation, but I always include folk songs in my set list. Because I was never well-off, I watched the TV show, &Gugak Hanmadang,& hundreds of times to practice the songs repeatedly. Also, I watched the performances of prominent folk and gugak singers and taught myself to sing like them. After seeing my performances, someone from New York called to invite me to perform, and he asked who my teacher was. I said, &I&m a self-taught singer,& and he immediately hung up on me. It implied that only those taught under the tutelage of prominent singers deserve the attention and recognition. While I knew this was only natural, I couldn&t help but feel that this situation was somewhat regrettable. 아들의 도전 My son&s incredible journey 한 때 아이는 한복이 불편하여 입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요즈음 다시 국악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아이는 한 두가지를 알려줘도 여러 가지 깨우친다. 또한 분야 특성상 남자아이가 희소하기 때문에 많은 선생님들께서 내 아이 도현이를 가르치고 싶어하신다. 게다가 도현이는 연습을 안하고 큰 무대에 올라가도 떨지 않고 잘 해낸다. 국악의 살아있는 전설 김뻐꾹 선생님께서도 도현이를 유망주라 생각하시고 많이 예뻐해주신다. 내 생각에 국악은 우리의 생각과 얼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며 나의 아이를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우리의 정서가 담긴 국악을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국악을 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림돌이 아이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지금이라도 다시 국악으로 돌아와 나와 같이 공부를 하고 공연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하며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도와주신 분들께도 주간인물을 통해 감사의 말씀 드린다. There was a time when my child complained about wearing hanbok because it was uncomfortable. These days, he has fallen in love with gugak again. When I teach my son just a couple of things, he realizes so many more. Because of his gender, many vocal teachers want to train him. He is not the type to get stage fright, even if he didn&t practice. Kim Ppeokkuk, the living legend in gugak, adores my son, Byeon Do-hyeon. I personally believe that gugak is the best way to express our thoughts and spirit as Koreans, and the best way to describe my child. Once, I&ve told my child, &It&s important to accept new things, but it&s just as important to maintain our traditions.& It is highly important for me to make sure that my child accepts gugak, which encompass the sentiments of Koreans, at his age because I&m fully aware of the many obstacles he would face if he were to try learning it later in his life. I&m grateful and happy that he has found his way to gugak again to study and perform it with me. I&d also like to extend my gratitude toward everyone who has helped us through Weekly People. 혼자 시작한 일을 이제는 아들과 함께 한다. 온전하게 세상으로부터 허락받은 유일한 것은 아들이라며 씁쓸하게 웃던 정소라 가수. 아들과 함께 하는 길에 박수를 보내며 주간인물은 그들의 힘찬 걸음을 응원한다. Singer Jeong So-ra now has company in her once lone journey. She gave a bitter smile, while saying that the only thing that has been granted to her by the world is her son. At Weekly People, we wish to applaud her for her hard work and dedication, and will support her journey with her son. 국악 가수 정소라 Gugak singer Jeong So-ra 타이틀곡 ‘떠난 사람’ Debut song &The Person Who Left& MC 이벤트 행사 전문 국악 가수 Gugak singer who mainly performs at emceed events 나는 홀로 서 있었다. There I stood alone. [1006]
    • 문화
    2017-02-01
  •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화가 이어져오고 있다. 미의 기준은 변할지언정 미를 향한 마음은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혹시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번 주 주간인물이 만나보았다. _이효정 ­­기자 의식의 차이가 차이를 만든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 당시에는 플로리스트가 고급스럽게 만든 꽃의 공급이 부족했다. 전무하다시피 했다. 또한 조화는 ‘성묘꽃’의 이미지가 강했다. ‘조화는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시들지도 않는데 왜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지 않을까?’ 그렇게 더플라워마켓이 시작되었다. “저는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사법 시험을 준비하다가 어느 날 고속터미널 꽃시장에 갔습니다. 선물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가격으로 15만원 어치 꽃을 샀습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한민선 대표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땐 꽃을 만질 줄 몰라서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고 했다. 꽃시장에 가보면 수 많은 플로리스트가 있다.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을 사와서 팔고 그들이 꽃 손질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배워서 팔았다고. “다른 과를 전공한 것의 장단점을 말한다면 장점으로는 전문가의 시선보다 소비자의 시선에 더 가깝기 때문에 좋은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점으로는 아무래도 정규 교육을 안 받았다는 사실이죠. 그 단점을 보완하고자 열심히 노력합니다.” 생화를 손질하다보면 물 올림이나 꽃이 피는 철과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조화는 손질 기법이 공예에 더 가깝기 때문에 단점도 노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와 소통은 내가 직접 더 플라워 마켓에는 CS(Customer Service)팀이 따로 있다. 그러나 한민선 대표는 고객의 클레임을 본인이 감수한다. “고객님들께서 무슨 문제를 가지고 계신지 혹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직접 듣는 것이 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조화돈꽃다발’이다. 일반적으로 돈꽃다발은 생화로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생화에서 나오는 수분으로 돈이 젖기 일쑤이며 가격도 비싼 편이다. 그러나 더 플라워 마켓의 돈꽃다발은 가격도 매우 합리적이며 사이즈 역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을 시작할 무렵 외환위기가 왔습니다. 플라워관련업종들은 아무래도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타격이 컸습니다. 주위 분들이 경기가 안 좋을수록 고급화 전략으로 가야한다고 충고를 해주셨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물하기 좋아해서 시작한 사업인데 어떻게 고객분들게 부담을 주는 가격의 상품을 구성할 수 있겠습니까? 초심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들로 더 플라워 마켓을 경영하고 있는 한민선 대표. 고객의 클레임을 직접 듣는 열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친근하고 신뢰감을 주고 싶다 “좀 더 친근하고 신뢰감을 주고 싶어서 브랜드 이름도 간결하게 만들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와보고 ‘어? 가격 괜찮네? 이것도 사볼까?’, ‘우와, 이거 예쁘다. 이런 디자인도 있네?’ 라고 소비자들이 반응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더 플라워 마켓에는 돈꽃다발 뿐만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위한 미니트리, 비누꽃다발, 가랜드와 같은 상품들도 있다. 매주 새로운 디자인이 출고되고 시즌마다, 계절마다 새로운 디자인과 인기가 있었던 디자인이 동시에 진행된다. “조화는 풍성하게도 가능하고 화사하며 내구성이 좋습니다. 또한 영원성도 있기 때문에 눈 앞에 두고 그 때를 회상할 수 있죠.” 새로운 도전 지난 10년간 더 플라워마켓은 일반 소비자분들의 입소문을 타고 조화와 크리스마스 장식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사 보셨을만한 업체로 성장했다. 소매로 10년간 성장해온 더 플라워 마켓이 작년부터 사업자 고객들을 위해 전문몰을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소매물을 운영하면서 얻은 노하우들로 사업자 고객들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 소비자 고객층들에게는 트렌드에 잘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업자 고객층들에겐 운영하면서 얻은 지식들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더 플라워 마켓이 한 층 더 성장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보니 그게 직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직업에서 발생하는 업무들을 좀 더 능숙하게 해내고 싶어 열심히 일하다보니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다. 사업을 확장하다보니 그것이 더 크고 튼튼한 궤도로 올라가고 싶은 꿈이 되었다. 명확하게 되고 싶은 꿈이 있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꿈이 된다는 한민선 대표. 그녀의 꿈에 박수를 보낸다. [1005]
    • 문화
    2017-01-17
  • 앙금의 놀라운 변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다. 여자 뿐만이 아니다. 앙금도 변신할 수 있다. 앙금의 놀라운 변신을 좌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번 주 주간인물에서 만난 편옥희 대표이다. 앙금의 놀라운 변신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_이효정 ­­기자 옥희 혹은 O.K 공방은 아늑했다. 훈훈한 공기가 추위로 언 몸을 녹여줬다. 추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따뜻한 커피를 내주었다. 인터뷰가 시작됨을 알리자 쑥쓰러워하며 웃음을 짓는 편옥희 대표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오직 아이들의 간식을 위해서 베이킹을 시작했단다. 공부하는 아이들을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쿠키를 만들었다. 그렇게 쿠키를 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입소문이 나서 ‘오키쿠키’라는 이름으로 수제쿠키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단다. “오키는 OKAY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오키도키하고 장난스럽게 발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 편옥희잖아요. 제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들리기도 해서 오키쿠키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수제쿠키 사업이 앙금플라워를 만나면서 새로운 물살을 탔다. 앙꼬블리의 태동이 시작된 것이다. “앙금과 러블리의 합성어로 사랑스러운 케이크로 행복한 순간을 선물한다는 의미로 앙꼬블리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이들의 간식과 지인들의 선물용으로 베이킹을 시작했지만 쿠키와 초콜렛 그리고 떡케이크를 접목시키면서 플라워케이크 브랜드로 인식할 수 있도록 이름을 바꾼 것이다. 즐거움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타고난 손재주를 가진 편옥희 대표. 앙금플라워를 배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마카롱에 앙금플라워로 장식을 해서 만든 플라워마카롱, 앙금을 이용해서 만든 앙금캐릭터케이크, 앙금으로 아이싱을 하여 화분까지 먹을 수 있는 앙금다육이까지. “시간이 흐른 후 이 일을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이 일을 시작했다면 상업적이고 욕심으로 가득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취미 생활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즐기면서 할 수 있고 즐거운 마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다양한 디자인의 원천이 됩니다.” 편옥희 대표는 어른과 아이들 모두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쿠키나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쿠키 같은 경우 명절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티타임을 즐기며 화목을 도모할 수 있는 효자상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 쿠키만으로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마카롱을 넣어봤단다. 마카롱까지 주다보니 활용도가 굉장히 높아지면서 앙꼬블리를 찾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또한 앙금다육이는 초코설기로 바닥을 만들고 앙금으로 다육이의 잎을 장식하고 초콜렛으로 돌 모양을 냈다. 아이들의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검은깨를 갈아서 만든 앙금캐릭터케이크 역시 마찬가지.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 자식들의 간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건강한 식재료는 필수라는 편옥희 대표. 호박, 백련초 등의 천연색소를 사용하여 기존 버터 플라워케익 등과 차별화를 두었으며, 특히 단호박, 비트, 자색 고구마 등을 직접 말리고 분쇄하여 사용하므로 맛과 향이 더 좋다는 것이 타사와 가지는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기 안에도 여러 견과류, 대추와 같은 부가물이 들어 가다보니 향도 진하고 씹히는 식감도 일품이다. 또한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용하고 싶어 4개월의 쇼콜라 과정도 이수했으며 앙금플라워 강습을 받으러 멀리 지방까지 가는 일도 서슴치 않았단다. 건강한 맛거리를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손 끝에서 피어나는 작품 계절마다 시즌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편옥희 대표. 수제쿠키, 초콜렛 그리고 앙금플라워까지. 팔방미인의 표본이다. 또한 카페 운영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카페 창업반을 열어 강습도 하고 원데이 클래스 운영도 하고 있다. 수업을 할 때 가까이서 하나하나 정성껏 알려주고 본인의 노하우도 전수하다보니 알음알음 수업을 듣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오면 실시간으로 답장을 보낸다. 맞춤이다보니 디자인 구성에도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인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손 끝에서 탄생한 모든 것들이 편옥희 대표의 작품인 셈. “저를 믿고 주문을 하신 분들의 즐거운 상황을 위해 많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좋은 피드백이 오면 너무 행복해요. 하나하나 만들 때는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피드백이 오니까 멈출 수가 없습니다. 힘들어도 이 맛에 열심히 하는거죠.” 10년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융통성있고 빠르게 행동 할 수 있다.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어린이들도 즐겁게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모든 경험들, 그러니까 살아오면서의 경험은 모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옥희 대표. 앞으로의 편옥희 대표에게 펼쳐질 많은 나날들을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1005]
    • 문화
    2017-01-17
  • 손 끝에서 피어나는 앙금꽃 한송이
    식문화가 서구화되면서 디저트 문화가 한국에 전파되었다. 잔치가 파티가 되어버린 것이다. 파티 문화가 확산되면서 파티의 주인공 케이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새로운 케이크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1 케이크의 김태희 대표. 그는 ‘케이크는 빵이다’라는 공식을 깨고 떡으로 케이크를 만들고 팥 앙금으로 장식을 올린다. 그가 만든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는 맛도 일품이지만 섬세한 꽃장식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주간인물이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의 새로운 도약을 따라가보았다._이효정 ­­기자 Q. 401 케이크. 이름이 특이하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A.저는 원래 미술 계통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생활이 무료하여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하고 싶어서 떡케이크 수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강하며 연습삼아 만든 떡케이크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것이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그 때 제가 사는 집 호수가 401호였습니다. Q. 앙금 플라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A.저는 원래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도 요리 잘 안하고 요리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죠. 그런데 앙금 플라워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다채로운 색감이 주는 압도적인 매력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색깔을 섞고 그것이 제 손 끝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너무 매력적입니다. 그렇게 앙금 플라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401 케이크가 가지는 타사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A.앙금꽃을 만들 때 디테일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색의 조화라던가 명암의 차이에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비주얼에 자신이 있습니다. 비주얼을 보고 앙금 떡케이크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의 이목을 더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색이 반복되면 단조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꽃의 ‘굴곡’과 같은 디테일이 더해지면 단조로움이 자연스러움으로 탈바꿈되는데 이것이 401이 가지는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가지는 교육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A.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창업을 목적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삶의 활력을 위해서 오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매일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새로운 취미를 개설하고자 하시는 분들인데요, 그런 분들이 자신의 손으로 예쁜 꽃을 만들고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모습이 매우 보기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오시는 분들이 삶에 활력을 찾아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에 참석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 A.앙금 플라워 떡케이크를 만드는 사람들을 플라워케이크 지도사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401 케이크는 지금처럼 원데이 클래스와 주문제작을 병행할 예정입니다. 또한 앙금플라워 떡케이크의 대중화에 앞장서기 위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늘리고 꽃 표현법이나 색깔 혹은 좀 더 맛있는 설기를 위한 레시피를 개발할 예정입니다. Q. 주간인물 독자들에게 한 마디. A.앙금플라워 떡케이크가 이제 조금씩 입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제가 있는 분야가 점점 인정을 받고 있는 추세라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혹시라도 앙금플라워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쯤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집-일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새로운 취미를 갖는다는 건 저의 세상을 더 넓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케이크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김태희 대표. 주간인물은 김태희 대표의 열정과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앞으로의 나날을 응원한다. PROFILE 現 401 앙금 플라워 대표 現 원데이 클래스 운영 [1003]
    • 문화
    2016-12-22

교육 검색결과

  • 동산(東山)의 소금
    강화도에서 태어나 12년간 인천의 명문 사학 동산고등학교의 수장으로 자리를 지킨 인물이 있다. 바로 1999년 43세의 나이에 교감이 되어 2005년 49세의 나이로 교장 자리에 오른 김건수 교장이다. 김건수 교장은 단지 ‘운’이 좋았고 ‘조상님이 쌓으신 덕’으로 이 위치에 올랐다며 자신은 그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35년 교직 생활의 반을 관리직으로 근무한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_이효정 기자 책임감이 가지는 무게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경기도 임용고사(그 당시엔 순위고사)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대학 졸업식장에서 만난 교수님의 추천으로 문경여고에서 교직을 시작하였다. 그 후 교육청에서 5월경 발령을 낸다며 교사자격증을 가져오라고 하였으나 문경여고에서 고 3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립의 길을 포기하였다. 개인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대학 입시에 열중인 사랑스런 제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월 봄방학 때 은사님을 찾아뵙기 위해 찾은 모교 동산고등학교에서 은사님의 권유로 새로운 교사의 길을 시작한다. 인성교육의 중요성 미국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류현진, LA에인젤스에서 뉴욕양키스로 자리를 옮긴 최지만 선수 등을 배출한 야구명문 동산고등학교는 몇 년 전 인천시 교육청 ‘효 체험 중심학교‘로 선정되어 부모님을 위한 세족식, 지역주민을 위한 경로잔치, 독거 어르신을 위한 생신 잔치를 7년여 간 진행하며 동산고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또한 매년 효 체험 수기를 공모하여 이를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부모님 및 어르신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인성을 더 길러주고 싶습니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김건수 교장은 은퇴 후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성폭력·가정 폭력 예방 교육’ 전문 강사와 ‘대한노인회 소속 자원봉사센터 전문 강사’에 매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한 평생 전인교육에 힘써온 그는 학생이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학생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찾아주는 것이 교육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퇴임 후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김건수 교장의 은퇴라이프를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PROFILE 現 성폭력·가정폭력예방교육전문강사 現 인천시 동구청 인사위원 現 인천지방검찰청검찰시민위원회위원장 現 대한노인회 자원봉사센터 강사 現 인천보호관찰소 법사랑위원 現 동산고등학교 교장 [1007]
    • 교육
    2017-02-17

메디컬 검색결과

  • 희귀질환의 예방 및 관리의 중요성과 유전 상담의 필요성
    누구나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중증의 희귀난치성질환자들에게 죽음은 일상이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 눈앞에 서성이기 때문에 환자 자신과 가족은 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희귀질환이 대물림 되는 경우 당사자나 부모의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은 배가 된다.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주간인물에서 만난 김현주 이사장이다. _ 이효정 기자 의사가 가지는 딜레마 1967년 연세의대 졸업 직후 25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서 평소 관심이 있던 유전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우선 소아과부터 시작했다.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72년 뉴욕 마운트 사이나의 의과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연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27년의 의사 교수생활을 끝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4년 아주대병원 설립 시 초빙되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유전학클리닉을 개소하고 유전질환 환자를 전문적으로 진료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의 희귀질환관련 의료 환경이 너무나 열악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희귀질환은 보통 질병과는 달리 진료검사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유전상담을 통해 치료,관리를 결정하게 되고 나아가 예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내 상황에서는 전문의로서의 역할만으로는 희귀질환 환자를 돕는데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김현주 이사장은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하는 의사로서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사회적 여건 조성」이라는 첫 도전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의 릴레이,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한국희귀질환재단은 보건복지부의 인가를 받은 공익재단이다. 인가를 받은 건 5년 정도 되었으나 실제로 한국희귀질환재단의 나이는 20살이 넘었다. 1994년 김현주 이사장이 한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사회적 여건조성」을 위한 10년 동안의 심포지엄과 “사랑의 릴레이,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일환으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와 간절한 염원을 담아 2010년 재단을 창단했기 때문이다. 희귀질환 특성상 대부분 치료약이 없는데다가 효율적인 치료약이 개발되었어도 국내에 수입이 되지 않았고 고가였기 때문에 김현주 이사장은 초창기에는 일 년에 두 번씩 미국을 왕래하면서 약을 가져다가 치료했다. 교수로 재직할 당시 원무과에 전화를 하여 필요한 약의 수급을 건의하기도 하고 정부에 희귀질환 환자들이 치료에 필요한 고가의 약에 대한 보험처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 SBS에서 ‘문성근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박종성 PD가 연락을 해왔다. 고셔 질환과 환우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파수를 타고 나간 방송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8년 장애인의 날에는 ARS 모금방송 “사랑의 한걸음”을 진행해달라고 요청이 왔다. 2004년 부천의 한 보육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모은 성금을 희귀질환 환아에게 써달라고 기부해왔다. 희귀 질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그와 관련하여 관심과 후원도 늘어나게 된 것이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의원결의(醫園結義)! 고셔병이라는 희귀 질환이 있다. 효소의 결핍으로 체내에 대사되지 못한 지질이 축적되어 발생하는 희귀 유전성 대사질환이다. 국내 고셔병 환자들은 10세가 되기도 전에 죽는 것으로 고찰되었다. 1991년 부족한 효소를 대체할 수 있는 약(효소대치술)이 개발되어 치료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정상생활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치료비가 비싸다보니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 1998년 그래서 김현주 이사장은 “사랑의 한걸음” ARS 모금 운동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IMF였는데도 불구하고 37만명이 6억을 모금했다. 또한 미국의 동포들도 방송을 보고 2억원의 후원금을 보내줬다. 뿐만 아니라 1000명의 미국 동포들이 보건복지부에 그 아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고가의 약재에 대한 보험급여을 받을 수 있도록 청원의 뜻을 담아 서명을 보내왔다. 김현주 이사장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병원으로 출근하고 일이 끝나면 누구보다 빨리 집에 가서 한 두시간이라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지냈던 힘든 나날들. 그러나 의사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지만, 귀국하여 의사의 역할만으로는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기억들. 김현주 이사장은 13년간 월급을 받으며 들었던 교수연금 퇴직일시금을 모두 한국희귀질환재단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했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에 계신 의사이신 딸의 시아버님이 힘을 보태왔다. 그 후원금을 포함해 기부금을 모아 한국희귀질환재단의 인가를 신청했지만 정부의 인가를 받기에는 기본재산이 부족했다. 6개월 내에 부족한 기본재산을 보충하기로 하고 2011년 6월 마침내 보건복지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공익재단으로 출범할 수 있었다.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모인 정성이 담긴 돈이기 때문에 절대로 헛되게 쓸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희귀질환과 유전상담 희귀질환은 말 그대로 희귀한 질환을 의미한다. 하나하나의 질환은 희소하지만 굉장히 다양하고 종류가 많다. 학회에 보고 된 것만으로도 7천여 종이 넘는다. 그 7천여 종의 희귀질환 중 80%는 유전이 원인이라고 밝혀져있다. 염색체의 이상, 유전자 변이 등으로 발병되기 때문이다. 희귀질환의 발현 양상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임상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아직 효율적인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않아 치명적이거나 난치성으로 장애를 초래하며 때로는 가족 내 재발 및 대물림 되어 가정이 붕괴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희귀질환의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환자의 가족력을 포함하여 자세한 병력과 생활습관까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 프로파일링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든다. 아직 정부의 구체적인 희귀질환 지원정책(유전상담에 대한 급여 및 전문유전상담사 수급 등)이 없는 상황에서 많은 병원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떠안아가며 희귀질환 진료와 유전 상담하는 것을 기피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한국희귀질환재단에서는 2012년 유전상담 지원사업을 첫 목적사업으로 시작하여 이제 곧 진료건수 2000회를 앞두고 있다. 많은 시간을 들여 환자에게 진단을 확인하고 유전상담을 통해서 환자와 가족에게 질환에 대한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적절한 희귀질환의 관리와 예방을 목표로 하는 유전상담서비스를 정부가 희귀질환관리와 예방에 필요한 의료서비스로 인정하여 제공하는 그날까지, 희귀질환 환자와 고위험군 가족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유전상담 지원사업을 재단이 감내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다. 희귀질환관리법 제정 후속조치, 정부의 역할 우리 나라에서 암 전문의는 1000명이 넘는다. 그러나 희귀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전문의는 전국에 40명 정도이다. 희귀질환과 관련된 전문의 수가 적고 환자의 개체 수도 많지 않다보니 국내 희귀질환은 대부분 오진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희귀 질환으로 진단받기까지 10년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간과 돈 그리고 심리적 부담이 엄청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현주 이사장은 정부에서 희귀질환을 공공의료로 접근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마침내 15년 12월에 희귀질환관리법에 대한 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어 통과되었다. 이제 정부에서는 희귀질환의 예방, 진료 및 연구 등에 관한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시행하여 희귀질환으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부담을 감소시키고 국민의 건강 증진 및 복지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할 산은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국내 의료 현황파악과 희귀질환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유전상담을 필요한 의료서비스로 지원,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의료현장에서 유전상담이 제공될 수 있도록 보험급여가 되어야 한다. 30분 이상 장시간 소요되는 유전상담을 제공할 비의사 전문유전 상담사를 교육, 양성하는 것 또한 필수 요건이다. 이제 희귀질환관리법이 제정되어 정부에서는 희귀질환의 예방과 관리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을 계획, 수행할 의무가 있고(희귀질환관리법 제 3조 의무)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이다. 유전상담사, 신직업 유망직종 아이티 산업의 발전으로 많은 분야의 직종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사회가 오고 있다. 일본의 한 보험회사에서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대신 AI 인공지능으로 대체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증상을 입력하면 질병이 진단되고 그에 따라 처방되는 AI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김현주 이사장은 예측한다. 즉 현재 5분간 진료에 필요한 의사는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유전상담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지난 2013년 고용노동부의 “일자리 창출 가능한 해외직업 연구”에서 선정된 바 있고 2014년 교육부의 “신직업유망직종”으로 선정된 유전상담사는 질환에 대한 의학적, 유전학적 정보를 정확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함으로써 환자와 가족에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질환에 대해 의논하고 상담하며 공감하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통해서 환자와 가족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유전상담사는 앞으로 그 필요성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신직업 유망직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김현주 이사장은 예측한다. 현재 의료 트렌드는 4P의 맞춤의료로 진화되고 있다. 즉 환자(patient) 중심으로, 질병의 예측(predict)과 예방(prevent)이 가능해지며 그리고 환자와 가족이 질병의 관리와 예방에 참여하는(participate) 의료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맞춤의료에서 유전상담서비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유전상담사의 교육과 양성을 지원하여 전문유전상담사의 수급에 노력할 의무가 있다. 희귀질환 관리와 예방에 필요한 유전상담을 의료서비스 급여로 책정하여 유전상담 서비스가 의료현장에서 환자와 가족에게 제공될 수 있게 되면 희귀질환의 적절한 관리와 예방을 통해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희귀질환의 대물림은 적절한 유전상담과 유전자 검사로 예방이 가능하다. 희귀질환재단이 희귀질환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유전상담서비스사업과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연구 지원을 통해 희귀질환자와 가족의 희망이 되기를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Profile 現 한국희귀질환 재단 이사장 現 건양대병원 유전상담클리닉 석좌교수 現 아주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의학유전학교실 명예교수 서울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2길 21 더샵서초 103동 407호 E-mail: raredisease@hanmail.net Tel: 02-523-9230 / Fax: 02-581-9230 후원계좌 예금주 : 한국희귀질환재단 기업은행 660-006337-04-010 [1005]
    • 메디컬
    2017-01-13

맛집탐방 검색결과

  • 행복을 찌는 케이크,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살아있는 것은 상처를 가진다. 그리고 여기, 그 상처를 위로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번 주 주간인물에서 주목하는 이원영 대표이다. _이효정 ­­기자 하루가 달달했으면 좋겠다 밖에서 본 공방은 뿌옇게 김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황빛 형광등이 따뜻해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반겨주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가 달고나‘라는 이름에서 ’하루‘는 DAY라는 뜻과 봄(春)はる이라는 뜻입니다.” 춥고 긴 겨울이 가고 나면 푸른 잎이 돋는 봄이 온다. 그 봄을 생각하면 설레임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이원영 대표는 자신의 공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설레고 따스하길 바란다고 했다. 또한 하루를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의 하루가 달달하길 바라는 마음에 ’하루가 달고나‘라는 이름을 지었다. 흔한 설기가 특별해지는 순간 하루가 달고나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자신이 먹기보단 누군가를 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용 케이크를 구매한다. 앙금으로만 쓰였던 부재료가 천연색소를 만나 꽃이 되어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어낸다. 흔히 먹을 수 있는 설기가 누군가에겐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 쌀을 빻을 때, 쌀을 내릴 때, 떡을 찔 때 등 온 정성을 다한다. 또한 쌀의 향이 부담된다는 한 손님의 말을 듣고 백설기에는 누룽지향의 향기쌀을 섞어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유기농 설탕을 사용하여 달달함과 담백한 맛을 살리는 등 섬세한 레시피는 지금도 여전히 개발 중이다. 소프트하고 쫀득하며 담백한 맛의 향연 떡. 어감으로도 느껴지는 무거움. 그러나 하루가 달고나의 떡케이크는 다르다. 카스테라처럼 가벼운 식감이 자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온보관이 용이하고 묵직한 설기의 질감을 줄여 어린아이, 남녀노소 모두 소화가 잘된다는 장점이 있다. 설기에도 흑임자, 크림치즈, 백설기, 단호박 등 여러 종류로 다양하다. 공방에서 직접 쌀을 담구고 빻고 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떡의 쫄깃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24시간 이상 지속된다. 열정으로 빚어낸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평생 손맛의 장인이 되고 싶다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떡케이크 공방.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고 공방 오픈을 한다. 그러나 이원영 대표는 절대로 공방을 운영하는 것을 만만히 보지 말라며 경고한다.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는 작은 아이지만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아이입니다. 많은 공방과 떡집의 설기 맛을 보고 다양한 체험을 하며 공방을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기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예요. 평생 손맛의 장인이 될 각오로 시작해야할 일입니다.” 그래서일까. 이원영 대표는 원데이 클래스, 정규 클래스, 창업 클래스 그리고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문화체험 수업도 병행하고 있다. 이원영 대표의 열정이 해외까지 전파가 된 것이다. “아무래도 맛으로 소문이 나다보니 더욱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떡을 찔 때도 기본 시간에 대한 철칙도 있고 레시피도 계속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넘어 해외까지 소개가 되는 이원영 대표의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 사랑과 열정. 주간인물은 이원영 대표의 열정에 존경을 표하며 하루가 고단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기대해본다. [1004]
    • 맛집탐방
    2017-01-06
  • 五餠二魚의 기적이 珈琲의 기적으로 커피의 매력, 그 달콤함
    가배(珈琲), 가비 혹은 양탕국(洋燙국)으로 고종 시절 우리나라에 전파된 커피. 그 후 시간이 흘러 현재 우리 나라의 커피 시장은 6조를 넘나든다. 또한 여러 체인점과 개인 카페가 문전성시를 이룬다. 바야흐로 커피 춘추전국시대인 것이다. 이런 난세 속에서도 뚜렷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곳이 있다. 바로 조셉의 커피나무. 그 위상 속으로 들어가보자._이효정 ­­기자 한 때는 인사동에서 전통차를 팔았다. 그러나 설탕에 절인 효소들을 많이 접하면서 건강에 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자기의 건강을 지키는거죠” 마침 커피가 점점 대중화가 되면서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차에서 커피로 관심사가 바뀌었고 그렇게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이왕 팔기로 시작한 거 제대로 팔아보자는 생각에 커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연구에 불과했지만, 어느새 커피 공부를 위해 커피 여행을 준비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비로소 커피 매력에 푹 빠진 자신을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강지형 대표. “커피 원두마다 가지고 있는 맛과 향이 다르고 어떻게 추출하냐에 따라 또 달라져요. 그게 커피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머신으로 커피를 추출하게 되면 다크한 맛이 강해진다.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하면 향과 맛이 더 부해진다. 또한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 또한 칼리타, 사이폰, 케맥스, 클레버 등과 같이 다양하다. 커피의 味學 매년 커피 박람회가 열린다. 커피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 많은 커피 체인점들도 점점 핸드드립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커피는 단지 멋이 아니라 맛을 따져가며 마시게 된 것이다. “보통 핸드드립은 직접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의 양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직접 연구를 해보니 핸드드립은 카페인의 양을 조절할 수 있어요. 그래서 카페인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주무셔서 커피를 안 드시는 분들이 우리 카페에 오시면 꼭 커피를 마십니다. 카페인 추출을 최소로 하고 향 추출은 최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맛과 향을 최대치로 늘리고 건강에도 좋은 커피를 만들고자 끊임없는 연구를 해온 강지형 대표. 손님들이 어떤 커피를 선호하는지 시장조사를 하며 건강한 커피를 위해 공부를 하다 보니 직접 커피 재배 농장에 방문하는 열의까지 보였다. 사랑은 커피를 타고 커피 공부를 위해 에티오피아까지 갔다. 거기서 ‘셰이드 그라운’ 커피를 만났다. 셰이드 그라운 커피란 그늘 재배 방식으로 기른 커피를 의미한다. 태생적으로 햇빛에 약한 커피나무들 사이에 큰 나무를 심는다. 큰 나무는 자연적으로 커피나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비와 바람을 막아준다. 그렇게 친환경적인 커피가 생산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커피에만 집중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커피를 둘러싼 배경까지 보이게 됐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행복한데 정작 커피를 생산하는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건강한 커피를 공부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건강하지 않은 유통 방식을 보며 강지형 대표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학교를 가야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커피체리를 따며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며 베푸는 삶을 실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커피에 사랑을 곁들인 강지형 대표의 제 2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커피가 방울방울 매일 방문하는 첫 번째 손님의 수익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기부를 한다. 또한 매달 첫 번째 금요일의 하루 전체 수익을 기부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매년 4월과 9월 두 번째 토요일에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벼룩시장을 연다.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 역시 기부를 한다. “처음에는 많이 주저했습니다. 나의 이익을 타인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이웃의 몫’이라고 생각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욕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강지형 대표의 따뜻한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후원과 참여로 최근에는 혜화동 성당 건너편에 천사의 마을이라는 가게도 운영하게 되었다. 지난 날 매주 일요일마다 대학로에서 벼룩시장을 주관했을 때보다 더 많은 수익이 발생한단다. “처음에는 100만원 정도 되던 벼룩시장의 수익이 점점 늘어 가장 많이 벌었던 날은 1300만원도 벌었어요. 2시간 동안 1300만원. 그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부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요.” 지난 한 해 기부한 돈이 1억이 넘는 강지형 대표. 소년과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커피를 사랑했고, 그러다보니 커피를 둘러싼 배경이 눈에 들어왔으며, 그렇게 자연스레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살게 되었다고 웃는 강지형 대표. 그의 표정이 참 따뜻했다. 추운 겨울에도 많은 이들이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지형 대표에게 주간인물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PROFILE 前 KBC 코리아 바리스타 챔피언십 심사위원(예선, 본선, 결선) 前 Angelinus 바리스타 챔피언십 심사위원(예선, 본선, 결선) 前 골드커피 어워드 추진 위원 前 골드커피 어워드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前 Angelinus 바리스타 월드 그랑프리 심사위원장 現 서울특별시 인재개발원 바리스타 특강 現 조셉의 커피나무 대표 [1003]
    • 맛집탐방
    2016-12-22

라이프 검색결과

  • 운동을 받아들인 삶의 즐거움
    평균 수명 100세의 시대에 도래했다. 어머니로부터 잉태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100년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늘어난 수명만큼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2017년 새해가 밝았다. 구정도 지났다. 이제 더 이상 2017년이 시작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올해는 꼭 살을 빼야지!‘,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해야지!’ 마음은 먹었으나 여전히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자가 있다. 바로 주간인물이 만나본 아시아머슬요가의 이하린 대표이다. _이효정 기자 누구나 아름다울 수 있다 이하린 대표는 39세의 나이에 머슬 마니아의 선수로 데뷔했다. 39세. 그 당시 40세의 나이를 바라보며 무대에 데뷔를 하는 선수는 이하린 대표 밖에 없었다. 머슬 마니아 선수들의 평균 나이는 20대였다. 이하린 대표가 선수로 출전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만류가 심했다. 그러나 이하린 대표는 출전해서 클래식 비키니부문 2위의 성적을 받았다. 머슬 마니아 수상을 시작으로 머슬마니아 세계 대회와 다양한 휘트니스 대회에서 다수의 수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장년층에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갖게 했다. 방송에서 통해 만난 낸시 랭 역시 이하린 대표의 영향을 받아서 머슬 마니아에 도전하였다. “누구나 운동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운동 수준과 다른 신체 능력의 폐해 개인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듯 미의 기준 역시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획일화 된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운동은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여 몸매를 바꾸는 것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매우 안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운동 수행 능력을 최하부터 최고까지 단계를 5등급으로 나눈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헬스장은 일반 사람들에게 4등급이나 5등급으로 지도를 합니다. 그게 일반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웨이트 트레이닝은 잘못하면 관절에 무리가 간다. 또한 간이나 신장 등 몸에서 노폐물을 제거하고 재생해야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무리하게 몸만 혹사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헬스장에 나가 신체 능력을 증진시키는 일이 일반인들에게는 꾸준한 운동의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 “사람마다 신체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운동 수행 능력도 다릅니다. 꾸준히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개인에 맞는 적절한 난이도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간단한 동작을 토대로 지도를 해야합니다.” 인생이란 꾸준히 도전하는 것 42세의 나이로 비키니를 입고 무대를 누빈다. 이번 5월에 있을 K트레이닝 위크의 이사로 취임을 하였으며 심사위원 직책 역시 작년에 이어 계속 될 예정이다. 지난 1월부턴 서울시 역도연맹 이사로 취임했다. 좀 더 대중적인 코드를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역도의 대중화에 앞장 설 예정이다. 또한 2017년도부턴 경기대학교 특별과정 외래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 학생들을 모집 중이라 매일매일 설렌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지금 현재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은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봤을 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도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하린 대표는 도전을 한다고 다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성공하는 몇 가지는 특화시키고 도전해서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도 하나의 경험으로 남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이하린 대표는 많은 방송 활동을 했다. 방송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한정적인 시간과 제한된 활동으로 더 다양한 컨텐츠를 선보일 수 없어 아쉽다고 했다. 그래서 올해 개인 채널을 통해 더 많고 풍부한 주제로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다. 해외의 여러 컨퍼런스를 다녀온 경험과 순천향대학교 건강과학대학원에서 아트 테라피의 과정인 무용동작심리치료 수업을 이수한 경험을 토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체 개선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 역시 개선하고 싶다고 이하린 대표는 말했다. 뚜렷한 주관과 그 주관이 걸어가는 길을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現 머슬 마니아 선수 現 경기대학교 경영대학원 아트머슬요가학과 교수 現 방송인 現 인터컨티넨탈호텔 수석코치 現 아시아머슬요가 협회 대표 現 서울시역도역맹 이사 [1007]
    • 라이프
    2017-02-20
  • 3代의 힘! 장충동의 랜드마크, 태극당
    할아버지는 민족의 이상을 담고자 1946년 태극당이라는 이름으로 빵집을 개업하셨다. 광복의 나라를 꿈꾸며 무궁화를 상징으로 삼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가족의 시대는 지났다. 산업화를 거치며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화 되었다. 세대 간 단절은 이미 흔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3대째 가업(家業)을 물려받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번 주 주간인물이 주목한 신경철 전무이사이다. _이효정 기자 할아버지와 아버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도 꾸준하게 소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태극당의 장인들이다. 70여년이 넘는 세월을 같이 하다 보니 평균 근속 연수는 40년이다. 빵이 발효를 거쳐야 맛있게 되는 것처럼 태극당 역시 3대(代)라는 전통을 거쳐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1946년 명동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장충동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맛있는 빵’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은 맛을 유지하기 때문에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스테디셀러인 모나카 아이스크림, 야채사라다빵, 그리고 버터크림케이크까지 모두 예전 레시피 그대로 제작하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방문했던 기억을 가지고 이제는 스스로가 아버지가 되어 태극당을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맺어진 가족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보니 마찰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경철 전무이사의 말은 달랐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대 회장님이신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한 달 뒤 창업주이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장남이자 태극당의 대표로 해야할 일들이 쏟아졌다. 그래도 견뎌낼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지금의 동료들과 가족들이 마음을 써준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익숙했다.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는 기꺼이 나가서 일을 도왔다. “선조께서 어떤 태도로 동료분들을 대하는지 봤기 때문에 저 역시 그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한 날 월급 봉투를 건낼 때 항상 손으로 ‘저희한테 해주신 것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어 전달한다. 신경철 전무이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동료였던 분들이 지금은 자신의 동료가 되어 같이 태극당을 끌고 간다며 동료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극당의 3代의 전통은 단지 ‘혈연(血緣)’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신경철 전무이사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공장장님은 지금도 새벽 4시 20분에 출근을 하시고 가장 늦게 퇴근을 하십니다.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이어가는 젊은 힘 일을 시작한 지 4년이 되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그렇다면 어떤 계획이 있을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태극당의 고유함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장충동에 위치한 태극당은 접근성이 용이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장충동의 랜드마크인 만큼. 그리고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손님들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팝업스토어. 또한 매장을 직접 방문하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최근 리모델링도 끝났다. 매장을 신식으로 바꾸는 것보단 옛 향수를 기억하며 오시는 분들과 태극당 전통을 고려하여 노후된 시설을 고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했다. 태극당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샹젤리제’는 창업 당시 있었던 것을 약간의 보수를 거쳐 다시 전시했다. 신경철 전무이사는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며 눈을 반짝였다. 또한 책상과 의자도 새로 교체했으나 디자인은 지금까지 태극당에 있었던 가구와 가장 동일한 것을 찾아 헤맸다. 오랜 손님들에겐 추억을 떠올리고 젊은 사람들은 새롭게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 신경철 전무이사는 태극당의 전통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게는 서울에 왔을 때 꼭 오고 싶은 곳, 크게는 대한민국을 방문했을 때 꼭 오고 싶은 곳으로 알려지는 것이 최종 목표라며 수줍게 웃었다. 창업주이신 1대 회장 할아버지와 2대 회장이었던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아 더 큰 세상으로 도약하려는 태극당. 그들의 앞날을 주간인물이 응원한다. [1007]
    • 라이프
    2017-02-17

포토뉴스 검색결과

  • 운동을 받아들인 삶의 즐거움
    평균 수명 100세의 시대에 도래했다. 어머니로부터 잉태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100년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늘어난 수명만큼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2017년 새해가 밝았다. 구정도 지났다. 이제 더 이상 2017년이 시작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올해는 꼭 살을 빼야지!‘,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해야지!’ 마음은 먹었으나 여전히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자가 있다. 바로 주간인물이 만나본 아시아머슬요가의 이하린 대표이다. _이효정 기자 누구나 아름다울 수 있다 이하린 대표는 39세의 나이에 머슬 마니아의 선수로 데뷔했다. 39세. 그 당시 40세의 나이를 바라보며 무대에 데뷔를 하는 선수는 이하린 대표 밖에 없었다. 머슬 마니아 선수들의 평균 나이는 20대였다. 이하린 대표가 선수로 출전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만류가 심했다. 그러나 이하린 대표는 출전해서 클래식 비키니부문 2위의 성적을 받았다. 머슬 마니아 수상을 시작으로 머슬마니아 세계 대회와 다양한 휘트니스 대회에서 다수의 수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장년층에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갖게 했다. 방송에서 통해 만난 낸시 랭 역시 이하린 대표의 영향을 받아서 머슬 마니아에 도전하였다. “누구나 운동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운동 수준과 다른 신체 능력의 폐해 개인마다 고유한 개성이 있듯 미의 기준 역시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획일화 된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운동은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여 몸매를 바꾸는 것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매우 안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운동 수행 능력을 최하부터 최고까지 단계를 5등급으로 나눈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헬스장은 일반 사람들에게 4등급이나 5등급으로 지도를 합니다. 그게 일반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웨이트 트레이닝은 잘못하면 관절에 무리가 간다. 또한 간이나 신장 등 몸에서 노폐물을 제거하고 재생해야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무리하게 몸만 혹사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헬스장에 나가 신체 능력을 증진시키는 일이 일반인들에게는 꾸준한 운동의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 “사람마다 신체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운동 수행 능력도 다릅니다. 꾸준히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개인에 맞는 적절한 난이도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간단한 동작을 토대로 지도를 해야합니다.” 인생이란 꾸준히 도전하는 것 42세의 나이로 비키니를 입고 무대를 누빈다. 이번 5월에 있을 K트레이닝 위크의 이사로 취임을 하였으며 심사위원 직책 역시 작년에 이어 계속 될 예정이다. 지난 1월부턴 서울시 역도연맹 이사로 취임했다. 좀 더 대중적인 코드를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역도의 대중화에 앞장 설 예정이다. 또한 2017년도부턴 경기대학교 특별과정 외래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 학생들을 모집 중이라 매일매일 설렌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지금 현재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은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봤을 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도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하린 대표는 도전을 한다고 다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성공하는 몇 가지는 특화시키고 도전해서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도 하나의 경험으로 남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이하린 대표는 많은 방송 활동을 했다. 방송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한정적인 시간과 제한된 활동으로 더 다양한 컨텐츠를 선보일 수 없어 아쉽다고 했다. 그래서 올해 개인 채널을 통해 더 많고 풍부한 주제로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다. 해외의 여러 컨퍼런스를 다녀온 경험과 순천향대학교 건강과학대학원에서 아트 테라피의 과정인 무용동작심리치료 수업을 이수한 경험을 토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체 개선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 역시 개선하고 싶다고 이하린 대표는 말했다. 뚜렷한 주관과 그 주관이 걸어가는 길을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現 머슬 마니아 선수 現 경기대학교 경영대학원 아트머슬요가학과 교수 現 방송인 現 인터컨티넨탈호텔 수석코치 現 아시아머슬요가 협회 대표 現 서울시역도역맹 이사 [1007]
    • 라이프
    2017-02-20
  • 동산(東山)의 소금
    강화도에서 태어나 12년간 인천의 명문 사학 동산고등학교의 수장으로 자리를 지킨 인물이 있다. 바로 1999년 43세의 나이에 교감이 되어 2005년 49세의 나이로 교장 자리에 오른 김건수 교장이다. 김건수 교장은 단지 ‘운’이 좋았고 ‘조상님이 쌓으신 덕’으로 이 위치에 올랐다며 자신은 그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35년 교직 생활의 반을 관리직으로 근무한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_이효정 기자 책임감이 가지는 무게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경기도 임용고사(그 당시엔 순위고사)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대학 졸업식장에서 만난 교수님의 추천으로 문경여고에서 교직을 시작하였다. 그 후 교육청에서 5월경 발령을 낸다며 교사자격증을 가져오라고 하였으나 문경여고에서 고 3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립의 길을 포기하였다. 개인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대학 입시에 열중인 사랑스런 제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월 봄방학 때 은사님을 찾아뵙기 위해 찾은 모교 동산고등학교에서 은사님의 권유로 새로운 교사의 길을 시작한다. 인성교육의 중요성 미국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류현진, LA에인젤스에서 뉴욕양키스로 자리를 옮긴 최지만 선수 등을 배출한 야구명문 동산고등학교는 몇 년 전 인천시 교육청 ‘효 체험 중심학교‘로 선정되어 부모님을 위한 세족식, 지역주민을 위한 경로잔치, 독거 어르신을 위한 생신 잔치를 7년여 간 진행하며 동산고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또한 매년 효 체험 수기를 공모하여 이를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부모님 및 어르신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인성을 더 길러주고 싶습니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김건수 교장은 은퇴 후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성폭력·가정 폭력 예방 교육’ 전문 강사와 ‘대한노인회 소속 자원봉사센터 전문 강사’에 매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한 평생 전인교육에 힘써온 그는 학생이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학생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찾아주는 것이 교육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퇴임 후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김건수 교장의 은퇴라이프를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PROFILE 現 성폭력·가정폭력예방교육전문강사 現 인천시 동구청 인사위원 現 인천지방검찰청검찰시민위원회위원장 現 대한노인회 자원봉사센터 강사 現 인천보호관찰소 법사랑위원 現 동산고등학교 교장 [1007]
    • 교육
    2017-02-17
  • 3代의 힘! 장충동의 랜드마크, 태극당
    할아버지는 민족의 이상을 담고자 1946년 태극당이라는 이름으로 빵집을 개업하셨다. 광복의 나라를 꿈꾸며 무궁화를 상징으로 삼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가족의 시대는 지났다. 산업화를 거치며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화 되었다. 세대 간 단절은 이미 흔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3대째 가업(家業)을 물려받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번 주 주간인물이 주목한 신경철 전무이사이다. _이효정 기자 할아버지와 아버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도 꾸준하게 소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태극당의 장인들이다. 70여년이 넘는 세월을 같이 하다 보니 평균 근속 연수는 40년이다. 빵이 발효를 거쳐야 맛있게 되는 것처럼 태극당 역시 3대(代)라는 전통을 거쳐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1946년 명동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장충동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맛있는 빵’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은 맛을 유지하기 때문에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스테디셀러인 모나카 아이스크림, 야채사라다빵, 그리고 버터크림케이크까지 모두 예전 레시피 그대로 제작하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방문했던 기억을 가지고 이제는 스스로가 아버지가 되어 태극당을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맺어진 가족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보니 마찰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경철 전무이사의 말은 달랐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대 회장님이신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한 달 뒤 창업주이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장남이자 태극당의 대표로 해야할 일들이 쏟아졌다. 그래도 견뎌낼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지금의 동료들과 가족들이 마음을 써준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익숙했다.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는 기꺼이 나가서 일을 도왔다. “선조께서 어떤 태도로 동료분들을 대하는지 봤기 때문에 저 역시 그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한 날 월급 봉투를 건낼 때 항상 손으로 ‘저희한테 해주신 것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어 전달한다. 신경철 전무이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동료였던 분들이 지금은 자신의 동료가 되어 같이 태극당을 끌고 간다며 동료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극당의 3代의 전통은 단지 ‘혈연(血緣)’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신경철 전무이사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공장장님은 지금도 새벽 4시 20분에 출근을 하시고 가장 늦게 퇴근을 하십니다.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이어가는 젊은 힘 일을 시작한 지 4년이 되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그렇다면 어떤 계획이 있을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태극당의 고유함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장충동에 위치한 태극당은 접근성이 용이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장충동의 랜드마크인 만큼. 그리고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손님들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팝업스토어. 또한 매장을 직접 방문하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최근 리모델링도 끝났다. 매장을 신식으로 바꾸는 것보단 옛 향수를 기억하며 오시는 분들과 태극당 전통을 고려하여 노후된 시설을 고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했다. 태극당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샹젤리제’는 창업 당시 있었던 것을 약간의 보수를 거쳐 다시 전시했다. 신경철 전무이사는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며 눈을 반짝였다. 또한 책상과 의자도 새로 교체했으나 디자인은 지금까지 태극당에 있었던 가구와 가장 동일한 것을 찾아 헤맸다. 오랜 손님들에겐 추억을 떠올리고 젊은 사람들은 새롭게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 신경철 전무이사는 태극당의 전통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게는 서울에 왔을 때 꼭 오고 싶은 곳, 크게는 대한민국을 방문했을 때 꼭 오고 싶은 곳으로 알려지는 것이 최종 목표라며 수줍게 웃었다. 창업주이신 1대 회장 할아버지와 2대 회장이었던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아 더 큰 세상으로 도약하려는 태극당. 그들의 앞날을 주간인물이 응원한다. [1007]
    • 라이프
    2017-02-17
  • 국악가수, 그 신선함 A gugak singer delivering a fresh sound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난 노래라는 뜻의 민요와 일제 강점기 시절 형성된 대중 가요 형식의 노래인 트로트. 이 두 장르를 융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사람이 있다. 이번주 주간인물이 만나본 국악 트로트 가수 정소라와 특별한 만남을 가져보았다._이효정 ­­기자 Folk music refers to music that was created by the people over time, while trot is a popular music genre that emerged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re is someone who has pioneered a brand new music genre by combining these two types of music. It's the gugak trot singer, Jeong So-ra, who was interviewed for this week&s feature on Weekly People._Lee Hyo-jeong 집에 있는 전축을 통해 유행곡을 들으며 살았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몸져 눕게 되면서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늘 가슴 속에선 가수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신월동을 지나고 있을 때 국악 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필름처럼 지나온 세월들이 순식간에 떠오르고 지나갔다. 한복을 좋아하던 나, 노래를 곧잘 부르던 나, 국악을 좋아하던 나……. 트로트는 힘든 삶을 노래로 표현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국악과 접목시켜보았다. 한(恨)이 서린 국악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고 트로트는 관객들에게 흥겨움을 불러일으켰다. I had spent my younger years playing the hit records on the LP player at home. When my parents fell ill, I had no choice, but to start working to provide for my family. Still, I retained in my heart the longtime aspirations to become a singer. Then, one day, I was walking in Sinwol-dong, Seoul when a gugak academy caught my eye. At that moment, memories from the past & how I dearly loved hanbok, how I loved to sing, how I loved gugak - flashed before my eyes. Trot was a great way to express my hardships in life, but in a limited way. So I decided to incorporate it with gugak. Gugak, which conveys the feelings of han (roughly translated to sorrow or resentment), resonated with the audiences, while trot excited them. 기회가 왔다. Then an opportunity knocked at my door. 국악으로 입소문이 났다. 소홀했던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아이가 예중에 갈 수 있도록 노경미 선생님과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했고 나는 우울증에 빠졌다. 아이 진학도 포기한 체 자리에 누워버렸다. 무대에 다시 오르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야위어 9개월을 정신과약으로 버티며 사경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무용가 김정희 선생님의 제안으로 아이와 함께 미국 동부 버지니아 공연에 나가게 되었다. 10살의 아이는 청춘가를 불렀고 관중을 휩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희망을 얻었다. 귀국 후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봉사도 다니면서 열심히 살았으며 그렇게 CD 제작의 기회가 왔으나 기획사의 두 번의 실패로 무산되었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가수 출신의 오영산 작곡가님을 만나 실패의 경험과 위로를 받았다. 오영산 선생님께서 이왕 CD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름 석자로 작사하여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셨고 그렇게 가수 정소라가 탄생하였으며 타이틀곡 ‘떠난 사람‘이 탄생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I gained fame as a gugak singer. I was able to start studying again, and an agreement was made for my child to train under Noh Gyeong-mi so that he could enroll in a middle school specializing in the arts. But I was scammed by an acquaintance, and that incident made me fall into depression. I became emaciated to a point where I couldn&t imagine myself performing on stage again. For 9 months, I tried direly to hold on to my sanity and my life, relying on psychiatric medications. Then, Then, one day, based on a suggestion from dancer Kim Jeong-hee, I took my child to perform in Virginia U.S.A. There, my 10-year-old left the crowd enraptured with his performance of “Cheongchunga (The Song of Youth).” After seeing this, I regained hope. Although I continued to suffer from financial hardships even after returning to Korea, I still worked hard, even volunteering from time to time. I was given an opportunity to record a CD, but the project fell through twice because of the record company. At a time of dejection, I found solace in singer-turned-composer Oh Young-san, who shared with me his own experiences of failures. Oh Young-san provided me with his full support, as he encouraged me to write my own lyrics and do what I needed to produce a CD. That&s how I came to be singer Jeong So-ra, and my debut song, &The Person Who Left,& was born. I&ll never forget that moment. 나의 아들 변도현 My child, Byeon Do-hyeon 아이는 어릴 때부터 끼가 충만했다. 남자 아이였기 때문에 나와 같은 길을 가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저 사람들에게 예쁨 받는 모습이 너무 예뻐 바라만 봤다. 아이는 내가 연습을 할 때 옆에서 곧잘 따라불렀다. 6살 때는 방송국에서 인기상도 받았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에게 민요와 트로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0살이 된 아이는 동부 버지니아에서 감사장까지 받았다. 나의 아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비록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시작했지만 나의 아이는 나보다 더 크고 튼튼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주겠다고 다짐했다. My child&s talent has been apparent even from a young age. But because my child was a boy, I never knew he&d walk the same path as I did. I just noticed how he was dearly loved by the crowd who listened to him. Whenever I practiced, he&d sing along next to me. When he was 6 years old, he received a popularity prize from a broadcasting station. That was when I began to teach my son folk music and trot in full swing. When he was 10, he received a certificate of appreciation from the State of Virginia. I was proud of my child, and I became resolved to help him foster his talent. As a self-taught singer, I began singing at a relatively late age, but I wanted to do my best to present my child with the best environment to nurture his talent so that he may be able to move on to a bigger world. 더 넓은 세상을 향해 Toward a bigger world 가요계에는 무명가수가 수 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일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 자리까지 온 것 만으로도 영광이고 행복하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 그리스, 뉴욕에서 공연을 하고 왔다. 한이 담긴 남도 민요부터 흥겨운 경기 민요까지 상황에 따라 부르는 곡은 다르지만 외국에 나가면 꼭 민요를 부른다.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국악 한 마당’을 보며 몇 백번씩 돌려보며 예습, 연습, 복습을 했다. 또한 대공연장에서 명창들의 공연을 어깨너머로 그들을 보며 독학으로 지금의 내가 됐노라고 자부한다. 나의 공연 모습을 보고 뉴욕에서 섭외 전화가 왔고 그 때 나에게 누구 제자냐는 질문을 해왔다. 내가 "저는 독학입니다."라고 말하자 전화가 끊겼다. 명창의 제자만 인정한다는 뜻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There are countless obscure singers in the music industry. I myself has a long way to go. However, I feel honored and take great pleasure in the fact that I&ve come this far. I performed in Italy, Greece and New York in 2016. The songs I choose to perform & from Namdo folk music that conveys han to the upbeat Gyeonggi folk music & depend on the situation, but I always include folk songs in my set list. Because I was never well-off, I watched the TV show, &Gugak Hanmadang,& hundreds of times to practice the songs repeatedly. Also, I watched the performances of prominent folk and gugak singers and taught myself to sing like them. After seeing my performances, someone from New York called to invite me to perform, and he asked who my teacher was. I said, &I&m a self-taught singer,& and he immediately hung up on me. It implied that only those taught under the tutelage of prominent singers deserve the attention and recognition. While I knew this was only natural, I couldn&t help but feel that this situation was somewhat regrettable. 아들의 도전 My son&s incredible journey 한 때 아이는 한복이 불편하여 입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요즈음 다시 국악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아이는 한 두가지를 알려줘도 여러 가지 깨우친다. 또한 분야 특성상 남자아이가 희소하기 때문에 많은 선생님들께서 내 아이 도현이를 가르치고 싶어하신다. 게다가 도현이는 연습을 안하고 큰 무대에 올라가도 떨지 않고 잘 해낸다. 국악의 살아있는 전설 김뻐꾹 선생님께서도 도현이를 유망주라 생각하시고 많이 예뻐해주신다. 내 생각에 국악은 우리의 생각과 얼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며 나의 아이를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우리의 정서가 담긴 국악을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국악을 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림돌이 아이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지금이라도 다시 국악으로 돌아와 나와 같이 공부를 하고 공연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하며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도와주신 분들께도 주간인물을 통해 감사의 말씀 드린다. There was a time when my child complained about wearing hanbok because it was uncomfortable. These days, he has fallen in love with gugak again. When I teach my son just a couple of things, he realizes so many more. Because of his gender, many vocal teachers want to train him. He is not the type to get stage fright, even if he didn&t practice. Kim Ppeokkuk, the living legend in gugak, adores my son, Byeon Do-hyeon. I personally believe that gugak is the best way to express our thoughts and spirit as Koreans, and the best way to describe my child. Once, I&ve told my child, &It&s important to accept new things, but it&s just as important to maintain our traditions.& It is highly important for me to make sure that my child accepts gugak, which encompass the sentiments of Koreans, at his age because I&m fully aware of the many obstacles he would face if he were to try learning it later in his life. I&m grateful and happy that he has found his way to gugak again to study and perform it with me. I&d also like to extend my gratitude toward everyone who has helped us through Weekly People. 혼자 시작한 일을 이제는 아들과 함께 한다. 온전하게 세상으로부터 허락받은 유일한 것은 아들이라며 씁쓸하게 웃던 정소라 가수. 아들과 함께 하는 길에 박수를 보내며 주간인물은 그들의 힘찬 걸음을 응원한다. Singer Jeong So-ra now has company in her once lone journey. She gave a bitter smile, while saying that the only thing that has been granted to her by the world is her son. At Weekly People, we wish to applaud her for her hard work and dedication, and will support her journey with her son. 국악 가수 정소라 Gugak singer Jeong So-ra 타이틀곡 ‘떠난 사람’ Debut song &The Person Who Left& MC 이벤트 행사 전문 국악 가수 Gugak singer who mainly performs at emceed events 나는 홀로 서 있었다. There I stood alone. [1006]
    • 문화
    2017-02-01
  •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화가 이어져오고 있다. 미의 기준은 변할지언정 미를 향한 마음은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혹시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번 주 주간인물이 만나보았다. _이효정 ­­기자 의식의 차이가 차이를 만든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 당시에는 플로리스트가 고급스럽게 만든 꽃의 공급이 부족했다. 전무하다시피 했다. 또한 조화는 ‘성묘꽃’의 이미지가 강했다. ‘조화는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시들지도 않는데 왜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지 않을까?’ 그렇게 더플라워마켓이 시작되었다. “저는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사법 시험을 준비하다가 어느 날 고속터미널 꽃시장에 갔습니다. 선물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가격으로 15만원 어치 꽃을 샀습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한민선 대표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땐 꽃을 만질 줄 몰라서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고 했다. 꽃시장에 가보면 수 많은 플로리스트가 있다.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을 사와서 팔고 그들이 꽃 손질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배워서 팔았다고. “다른 과를 전공한 것의 장단점을 말한다면 장점으로는 전문가의 시선보다 소비자의 시선에 더 가깝기 때문에 좋은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점으로는 아무래도 정규 교육을 안 받았다는 사실이죠. 그 단점을 보완하고자 열심히 노력합니다.” 생화를 손질하다보면 물 올림이나 꽃이 피는 철과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조화는 손질 기법이 공예에 더 가깝기 때문에 단점도 노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와 소통은 내가 직접 더 플라워 마켓에는 CS(Customer Service)팀이 따로 있다. 그러나 한민선 대표는 고객의 클레임을 본인이 감수한다. “고객님들께서 무슨 문제를 가지고 계신지 혹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직접 듣는 것이 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조화돈꽃다발’이다. 일반적으로 돈꽃다발은 생화로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생화에서 나오는 수분으로 돈이 젖기 일쑤이며 가격도 비싼 편이다. 그러나 더 플라워 마켓의 돈꽃다발은 가격도 매우 합리적이며 사이즈 역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을 시작할 무렵 외환위기가 왔습니다. 플라워관련업종들은 아무래도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타격이 컸습니다. 주위 분들이 경기가 안 좋을수록 고급화 전략으로 가야한다고 충고를 해주셨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물하기 좋아해서 시작한 사업인데 어떻게 고객분들게 부담을 주는 가격의 상품을 구성할 수 있겠습니까? 초심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들로 더 플라워 마켓을 경영하고 있는 한민선 대표. 고객의 클레임을 직접 듣는 열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친근하고 신뢰감을 주고 싶다 “좀 더 친근하고 신뢰감을 주고 싶어서 브랜드 이름도 간결하게 만들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와보고 ‘어? 가격 괜찮네? 이것도 사볼까?’, ‘우와, 이거 예쁘다. 이런 디자인도 있네?’ 라고 소비자들이 반응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더 플라워 마켓에는 돈꽃다발 뿐만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위한 미니트리, 비누꽃다발, 가랜드와 같은 상품들도 있다. 매주 새로운 디자인이 출고되고 시즌마다, 계절마다 새로운 디자인과 인기가 있었던 디자인이 동시에 진행된다. “조화는 풍성하게도 가능하고 화사하며 내구성이 좋습니다. 또한 영원성도 있기 때문에 눈 앞에 두고 그 때를 회상할 수 있죠.” 새로운 도전 지난 10년간 더 플라워마켓은 일반 소비자분들의 입소문을 타고 조화와 크리스마스 장식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사 보셨을만한 업체로 성장했다. 소매로 10년간 성장해온 더 플라워 마켓이 작년부터 사업자 고객들을 위해 전문몰을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소매물을 운영하면서 얻은 노하우들로 사업자 고객들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 소비자 고객층들에게는 트렌드에 잘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업자 고객층들에겐 운영하면서 얻은 지식들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더 플라워 마켓이 한 층 더 성장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보니 그게 직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직업에서 발생하는 업무들을 좀 더 능숙하게 해내고 싶어 열심히 일하다보니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다. 사업을 확장하다보니 그것이 더 크고 튼튼한 궤도로 올라가고 싶은 꿈이 되었다. 명확하게 되고 싶은 꿈이 있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꿈이 된다는 한민선 대표. 그녀의 꿈에 박수를 보낸다. [1005]
    • 문화
    2017-01-17
  • 앙금의 놀라운 변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다. 여자 뿐만이 아니다. 앙금도 변신할 수 있다. 앙금의 놀라운 변신을 좌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번 주 주간인물에서 만난 편옥희 대표이다. 앙금의 놀라운 변신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_이효정 ­­기자 옥희 혹은 O.K 공방은 아늑했다. 훈훈한 공기가 추위로 언 몸을 녹여줬다. 추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따뜻한 커피를 내주었다. 인터뷰가 시작됨을 알리자 쑥쓰러워하며 웃음을 짓는 편옥희 대표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오직 아이들의 간식을 위해서 베이킹을 시작했단다. 공부하는 아이들을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쿠키를 만들었다. 그렇게 쿠키를 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입소문이 나서 ‘오키쿠키’라는 이름으로 수제쿠키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단다. “오키는 OKAY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오키도키하고 장난스럽게 발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 편옥희잖아요. 제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들리기도 해서 오키쿠키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수제쿠키 사업이 앙금플라워를 만나면서 새로운 물살을 탔다. 앙꼬블리의 태동이 시작된 것이다. “앙금과 러블리의 합성어로 사랑스러운 케이크로 행복한 순간을 선물한다는 의미로 앙꼬블리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이들의 간식과 지인들의 선물용으로 베이킹을 시작했지만 쿠키와 초콜렛 그리고 떡케이크를 접목시키면서 플라워케이크 브랜드로 인식할 수 있도록 이름을 바꾼 것이다. 즐거움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타고난 손재주를 가진 편옥희 대표. 앙금플라워를 배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마카롱에 앙금플라워로 장식을 해서 만든 플라워마카롱, 앙금을 이용해서 만든 앙금캐릭터케이크, 앙금으로 아이싱을 하여 화분까지 먹을 수 있는 앙금다육이까지. “시간이 흐른 후 이 일을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이 일을 시작했다면 상업적이고 욕심으로 가득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취미 생활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즐기면서 할 수 있고 즐거운 마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다양한 디자인의 원천이 됩니다.” 편옥희 대표는 어른과 아이들 모두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쿠키나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쿠키 같은 경우 명절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티타임을 즐기며 화목을 도모할 수 있는 효자상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 쿠키만으로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마카롱을 넣어봤단다. 마카롱까지 주다보니 활용도가 굉장히 높아지면서 앙꼬블리를 찾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또한 앙금다육이는 초코설기로 바닥을 만들고 앙금으로 다육이의 잎을 장식하고 초콜렛으로 돌 모양을 냈다. 아이들의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검은깨를 갈아서 만든 앙금캐릭터케이크 역시 마찬가지.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 자식들의 간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건강한 식재료는 필수라는 편옥희 대표. 호박, 백련초 등의 천연색소를 사용하여 기존 버터 플라워케익 등과 차별화를 두었으며, 특히 단호박, 비트, 자색 고구마 등을 직접 말리고 분쇄하여 사용하므로 맛과 향이 더 좋다는 것이 타사와 가지는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기 안에도 여러 견과류, 대추와 같은 부가물이 들어 가다보니 향도 진하고 씹히는 식감도 일품이다. 또한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용하고 싶어 4개월의 쇼콜라 과정도 이수했으며 앙금플라워 강습을 받으러 멀리 지방까지 가는 일도 서슴치 않았단다. 건강한 맛거리를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손 끝에서 피어나는 작품 계절마다 시즌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편옥희 대표. 수제쿠키, 초콜렛 그리고 앙금플라워까지. 팔방미인의 표본이다. 또한 카페 운영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카페 창업반을 열어 강습도 하고 원데이 클래스 운영도 하고 있다. 수업을 할 때 가까이서 하나하나 정성껏 알려주고 본인의 노하우도 전수하다보니 알음알음 수업을 듣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오면 실시간으로 답장을 보낸다. 맞춤이다보니 디자인 구성에도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인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손 끝에서 탄생한 모든 것들이 편옥희 대표의 작품인 셈. “저를 믿고 주문을 하신 분들의 즐거운 상황을 위해 많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좋은 피드백이 오면 너무 행복해요. 하나하나 만들 때는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피드백이 오니까 멈출 수가 없습니다. 힘들어도 이 맛에 열심히 하는거죠.” 10년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융통성있고 빠르게 행동 할 수 있다.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어린이들도 즐겁게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모든 경험들, 그러니까 살아오면서의 경험은 모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옥희 대표. 앞으로의 편옥희 대표에게 펼쳐질 많은 나날들을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1005]
    • 문화
    2017-01-17
  • 희귀질환의 예방 및 관리의 중요성과 유전 상담의 필요성
    누구나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중증의 희귀난치성질환자들에게 죽음은 일상이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 눈앞에 서성이기 때문에 환자 자신과 가족은 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희귀질환이 대물림 되는 경우 당사자나 부모의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은 배가 된다.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주간인물에서 만난 김현주 이사장이다. _ 이효정 기자 의사가 가지는 딜레마 1967년 연세의대 졸업 직후 25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서 평소 관심이 있던 유전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우선 소아과부터 시작했다.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72년 뉴욕 마운트 사이나의 의과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연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27년의 의사 교수생활을 끝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4년 아주대병원 설립 시 초빙되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유전학클리닉을 개소하고 유전질환 환자를 전문적으로 진료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의 희귀질환관련 의료 환경이 너무나 열악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희귀질환은 보통 질병과는 달리 진료검사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유전상담을 통해 치료,관리를 결정하게 되고 나아가 예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내 상황에서는 전문의로서의 역할만으로는 희귀질환 환자를 돕는데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김현주 이사장은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하는 의사로서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사회적 여건 조성」이라는 첫 도전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의 릴레이,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한국희귀질환재단은 보건복지부의 인가를 받은 공익재단이다. 인가를 받은 건 5년 정도 되었으나 실제로 한국희귀질환재단의 나이는 20살이 넘었다. 1994년 김현주 이사장이 한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사회적 여건조성」을 위한 10년 동안의 심포지엄과 “사랑의 릴레이,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일환으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와 간절한 염원을 담아 2010년 재단을 창단했기 때문이다. 희귀질환 특성상 대부분 치료약이 없는데다가 효율적인 치료약이 개발되었어도 국내에 수입이 되지 않았고 고가였기 때문에 김현주 이사장은 초창기에는 일 년에 두 번씩 미국을 왕래하면서 약을 가져다가 치료했다. 교수로 재직할 당시 원무과에 전화를 하여 필요한 약의 수급을 건의하기도 하고 정부에 희귀질환 환자들이 치료에 필요한 고가의 약에 대한 보험처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 SBS에서 ‘문성근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박종성 PD가 연락을 해왔다. 고셔 질환과 환우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파수를 타고 나간 방송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8년 장애인의 날에는 ARS 모금방송 “사랑의 한걸음”을 진행해달라고 요청이 왔다. 2004년 부천의 한 보육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모은 성금을 희귀질환 환아에게 써달라고 기부해왔다. 희귀 질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그와 관련하여 관심과 후원도 늘어나게 된 것이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의원결의(醫園結義)! 고셔병이라는 희귀 질환이 있다. 효소의 결핍으로 체내에 대사되지 못한 지질이 축적되어 발생하는 희귀 유전성 대사질환이다. 국내 고셔병 환자들은 10세가 되기도 전에 죽는 것으로 고찰되었다. 1991년 부족한 효소를 대체할 수 있는 약(효소대치술)이 개발되어 치료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정상생활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치료비가 비싸다보니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 1998년 그래서 김현주 이사장은 “사랑의 한걸음” ARS 모금 운동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IMF였는데도 불구하고 37만명이 6억을 모금했다. 또한 미국의 동포들도 방송을 보고 2억원의 후원금을 보내줬다. 뿐만 아니라 1000명의 미국 동포들이 보건복지부에 그 아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고가의 약재에 대한 보험급여을 받을 수 있도록 청원의 뜻을 담아 서명을 보내왔다. 김현주 이사장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병원으로 출근하고 일이 끝나면 누구보다 빨리 집에 가서 한 두시간이라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지냈던 힘든 나날들. 그러나 의사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지만, 귀국하여 의사의 역할만으로는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기억들. 김현주 이사장은 13년간 월급을 받으며 들었던 교수연금 퇴직일시금을 모두 한국희귀질환재단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했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에 계신 의사이신 딸의 시아버님이 힘을 보태왔다. 그 후원금을 포함해 기부금을 모아 한국희귀질환재단의 인가를 신청했지만 정부의 인가를 받기에는 기본재산이 부족했다. 6개월 내에 부족한 기본재산을 보충하기로 하고 2011년 6월 마침내 보건복지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공익재단으로 출범할 수 있었다.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모인 정성이 담긴 돈이기 때문에 절대로 헛되게 쓸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희귀질환과 유전상담 희귀질환은 말 그대로 희귀한 질환을 의미한다. 하나하나의 질환은 희소하지만 굉장히 다양하고 종류가 많다. 학회에 보고 된 것만으로도 7천여 종이 넘는다. 그 7천여 종의 희귀질환 중 80%는 유전이 원인이라고 밝혀져있다. 염색체의 이상, 유전자 변이 등으로 발병되기 때문이다. 희귀질환의 발현 양상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임상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아직 효율적인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않아 치명적이거나 난치성으로 장애를 초래하며 때로는 가족 내 재발 및 대물림 되어 가정이 붕괴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희귀질환의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환자의 가족력을 포함하여 자세한 병력과 생활습관까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 프로파일링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든다. 아직 정부의 구체적인 희귀질환 지원정책(유전상담에 대한 급여 및 전문유전상담사 수급 등)이 없는 상황에서 많은 병원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떠안아가며 희귀질환 진료와 유전 상담하는 것을 기피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한국희귀질환재단에서는 2012년 유전상담 지원사업을 첫 목적사업으로 시작하여 이제 곧 진료건수 2000회를 앞두고 있다. 많은 시간을 들여 환자에게 진단을 확인하고 유전상담을 통해서 환자와 가족에게 질환에 대한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적절한 희귀질환의 관리와 예방을 목표로 하는 유전상담서비스를 정부가 희귀질환관리와 예방에 필요한 의료서비스로 인정하여 제공하는 그날까지, 희귀질환 환자와 고위험군 가족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유전상담 지원사업을 재단이 감내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다. 희귀질환관리법 제정 후속조치, 정부의 역할 우리 나라에서 암 전문의는 1000명이 넘는다. 그러나 희귀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전문의는 전국에 40명 정도이다. 희귀질환과 관련된 전문의 수가 적고 환자의 개체 수도 많지 않다보니 국내 희귀질환은 대부분 오진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희귀 질환으로 진단받기까지 10년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간과 돈 그리고 심리적 부담이 엄청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현주 이사장은 정부에서 희귀질환을 공공의료로 접근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마침내 15년 12월에 희귀질환관리법에 대한 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어 통과되었다. 이제 정부에서는 희귀질환의 예방, 진료 및 연구 등에 관한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시행하여 희귀질환으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부담을 감소시키고 국민의 건강 증진 및 복지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할 산은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국내 의료 현황파악과 희귀질환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유전상담을 필요한 의료서비스로 지원,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의료현장에서 유전상담이 제공될 수 있도록 보험급여가 되어야 한다. 30분 이상 장시간 소요되는 유전상담을 제공할 비의사 전문유전 상담사를 교육, 양성하는 것 또한 필수 요건이다. 이제 희귀질환관리법이 제정되어 정부에서는 희귀질환의 예방과 관리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을 계획, 수행할 의무가 있고(희귀질환관리법 제 3조 의무)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이다. 유전상담사, 신직업 유망직종 아이티 산업의 발전으로 많은 분야의 직종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사회가 오고 있다. 일본의 한 보험회사에서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대신 AI 인공지능으로 대체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증상을 입력하면 질병이 진단되고 그에 따라 처방되는 AI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김현주 이사장은 예측한다. 즉 현재 5분간 진료에 필요한 의사는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유전상담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지난 2013년 고용노동부의 “일자리 창출 가능한 해외직업 연구”에서 선정된 바 있고 2014년 교육부의 “신직업유망직종”으로 선정된 유전상담사는 질환에 대한 의학적, 유전학적 정보를 정확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함으로써 환자와 가족에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질환에 대해 의논하고 상담하며 공감하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통해서 환자와 가족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유전상담사는 앞으로 그 필요성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신직업 유망직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김현주 이사장은 예측한다. 현재 의료 트렌드는 4P의 맞춤의료로 진화되고 있다. 즉 환자(patient) 중심으로, 질병의 예측(predict)과 예방(prevent)이 가능해지며 그리고 환자와 가족이 질병의 관리와 예방에 참여하는(participate) 의료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맞춤의료에서 유전상담서비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유전상담사의 교육과 양성을 지원하여 전문유전상담사의 수급에 노력할 의무가 있다. 희귀질환 관리와 예방에 필요한 유전상담을 의료서비스 급여로 책정하여 유전상담 서비스가 의료현장에서 환자와 가족에게 제공될 수 있게 되면 희귀질환의 적절한 관리와 예방을 통해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희귀질환의 대물림은 적절한 유전상담과 유전자 검사로 예방이 가능하다. 희귀질환재단이 희귀질환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유전상담서비스사업과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연구 지원을 통해 희귀질환자와 가족의 희망이 되기를 주간인물은 응원한다. Profile 現 한국희귀질환 재단 이사장 現 건양대병원 유전상담클리닉 석좌교수 現 아주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의학유전학교실 명예교수 서울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2길 21 더샵서초 103동 407호 E-mail: raredisease@hanmail.net Tel: 02-523-9230 / Fax: 02-581-9230 후원계좌 예금주 : 한국희귀질환재단 기업은행 660-006337-04-010 [1005]
    • 메디컬
    2017-01-13
  • 행복을 찌는 케이크,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살아있는 것은 상처를 가진다. 그리고 여기, 그 상처를 위로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번 주 주간인물에서 주목하는 이원영 대표이다. _이효정 ­­기자 하루가 달달했으면 좋겠다 밖에서 본 공방은 뿌옇게 김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황빛 형광등이 따뜻해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반겨주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가 달고나‘라는 이름에서 ’하루‘는 DAY라는 뜻과 봄(春)はる이라는 뜻입니다.” 춥고 긴 겨울이 가고 나면 푸른 잎이 돋는 봄이 온다. 그 봄을 생각하면 설레임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이원영 대표는 자신의 공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설레고 따스하길 바란다고 했다. 또한 하루를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의 하루가 달달하길 바라는 마음에 ’하루가 달고나‘라는 이름을 지었다. 흔한 설기가 특별해지는 순간 하루가 달고나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자신이 먹기보단 누군가를 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용 케이크를 구매한다. 앙금으로만 쓰였던 부재료가 천연색소를 만나 꽃이 되어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어낸다. 흔히 먹을 수 있는 설기가 누군가에겐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 쌀을 빻을 때, 쌀을 내릴 때, 떡을 찔 때 등 온 정성을 다한다. 또한 쌀의 향이 부담된다는 한 손님의 말을 듣고 백설기에는 누룽지향의 향기쌀을 섞어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유기농 설탕을 사용하여 달달함과 담백한 맛을 살리는 등 섬세한 레시피는 지금도 여전히 개발 중이다. 소프트하고 쫀득하며 담백한 맛의 향연 떡. 어감으로도 느껴지는 무거움. 그러나 하루가 달고나의 떡케이크는 다르다. 카스테라처럼 가벼운 식감이 자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온보관이 용이하고 묵직한 설기의 질감을 줄여 어린아이, 남녀노소 모두 소화가 잘된다는 장점이 있다. 설기에도 흑임자, 크림치즈, 백설기, 단호박 등 여러 종류로 다양하다. 공방에서 직접 쌀을 담구고 빻고 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떡의 쫄깃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24시간 이상 지속된다. 열정으로 빚어낸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평생 손맛의 장인이 되고 싶다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떡케이크 공방.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고 공방 오픈을 한다. 그러나 이원영 대표는 절대로 공방을 운영하는 것을 만만히 보지 말라며 경고한다.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는 작은 아이지만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아이입니다. 많은 공방과 떡집의 설기 맛을 보고 다양한 체험을 하며 공방을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기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예요. 평생 손맛의 장인이 될 각오로 시작해야할 일입니다.” 그래서일까. 이원영 대표는 원데이 클래스, 정규 클래스, 창업 클래스 그리고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문화체험 수업도 병행하고 있다. 이원영 대표의 열정이 해외까지 전파가 된 것이다. “아무래도 맛으로 소문이 나다보니 더욱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떡을 찔 때도 기본 시간에 대한 철칙도 있고 레시피도 계속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넘어 해외까지 소개가 되는 이원영 대표의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 사랑과 열정. 주간인물은 이원영 대표의 열정에 존경을 표하며 하루가 고단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기대해본다. [1004]
    • 맛집탐방
    2017-01-06
  • 五餠二魚의 기적이 珈琲의 기적으로 커피의 매력, 그 달콤함
    가배(珈琲), 가비 혹은 양탕국(洋燙국)으로 고종 시절 우리나라에 전파된 커피. 그 후 시간이 흘러 현재 우리 나라의 커피 시장은 6조를 넘나든다. 또한 여러 체인점과 개인 카페가 문전성시를 이룬다. 바야흐로 커피 춘추전국시대인 것이다. 이런 난세 속에서도 뚜렷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곳이 있다. 바로 조셉의 커피나무. 그 위상 속으로 들어가보자._이효정 ­­기자 한 때는 인사동에서 전통차를 팔았다. 그러나 설탕에 절인 효소들을 많이 접하면서 건강에 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자기의 건강을 지키는거죠” 마침 커피가 점점 대중화가 되면서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차에서 커피로 관심사가 바뀌었고 그렇게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이왕 팔기로 시작한 거 제대로 팔아보자는 생각에 커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연구에 불과했지만, 어느새 커피 공부를 위해 커피 여행을 준비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비로소 커피 매력에 푹 빠진 자신을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강지형 대표. “커피 원두마다 가지고 있는 맛과 향이 다르고 어떻게 추출하냐에 따라 또 달라져요. 그게 커피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머신으로 커피를 추출하게 되면 다크한 맛이 강해진다.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하면 향과 맛이 더 부해진다. 또한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 또한 칼리타, 사이폰, 케맥스, 클레버 등과 같이 다양하다. 커피의 味學 매년 커피 박람회가 열린다. 커피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 많은 커피 체인점들도 점점 핸드드립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커피는 단지 멋이 아니라 맛을 따져가며 마시게 된 것이다. “보통 핸드드립은 직접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의 양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직접 연구를 해보니 핸드드립은 카페인의 양을 조절할 수 있어요. 그래서 카페인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주무셔서 커피를 안 드시는 분들이 우리 카페에 오시면 꼭 커피를 마십니다. 카페인 추출을 최소로 하고 향 추출은 최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맛과 향을 최대치로 늘리고 건강에도 좋은 커피를 만들고자 끊임없는 연구를 해온 강지형 대표. 손님들이 어떤 커피를 선호하는지 시장조사를 하며 건강한 커피를 위해 공부를 하다 보니 직접 커피 재배 농장에 방문하는 열의까지 보였다. 사랑은 커피를 타고 커피 공부를 위해 에티오피아까지 갔다. 거기서 ‘셰이드 그라운’ 커피를 만났다. 셰이드 그라운 커피란 그늘 재배 방식으로 기른 커피를 의미한다. 태생적으로 햇빛에 약한 커피나무들 사이에 큰 나무를 심는다. 큰 나무는 자연적으로 커피나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비와 바람을 막아준다. 그렇게 친환경적인 커피가 생산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커피에만 집중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커피를 둘러싼 배경까지 보이게 됐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행복한데 정작 커피를 생산하는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건강한 커피를 공부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건강하지 않은 유통 방식을 보며 강지형 대표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학교를 가야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커피체리를 따며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며 베푸는 삶을 실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커피에 사랑을 곁들인 강지형 대표의 제 2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커피가 방울방울 매일 방문하는 첫 번째 손님의 수익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기부를 한다. 또한 매달 첫 번째 금요일의 하루 전체 수익을 기부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매년 4월과 9월 두 번째 토요일에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벼룩시장을 연다.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 역시 기부를 한다. “처음에는 많이 주저했습니다. 나의 이익을 타인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이웃의 몫’이라고 생각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욕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강지형 대표의 따뜻한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후원과 참여로 최근에는 혜화동 성당 건너편에 천사의 마을이라는 가게도 운영하게 되었다. 지난 날 매주 일요일마다 대학로에서 벼룩시장을 주관했을 때보다 더 많은 수익이 발생한단다. “처음에는 100만원 정도 되던 벼룩시장의 수익이 점점 늘어 가장 많이 벌었던 날은 1300만원도 벌었어요. 2시간 동안 1300만원. 그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부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요.” 지난 한 해 기부한 돈이 1억이 넘는 강지형 대표. 소년과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커피를 사랑했고, 그러다보니 커피를 둘러싼 배경이 눈에 들어왔으며, 그렇게 자연스레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살게 되었다고 웃는 강지형 대표. 그의 표정이 참 따뜻했다. 추운 겨울에도 많은 이들이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지형 대표에게 주간인물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PROFILE 前 KBC 코리아 바리스타 챔피언십 심사위원(예선, 본선, 결선) 前 Angelinus 바리스타 챔피언십 심사위원(예선, 본선, 결선) 前 골드커피 어워드 추진 위원 前 골드커피 어워드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前 Angelinus 바리스타 월드 그랑프리 심사위원장 現 서울특별시 인재개발원 바리스타 특강 現 조셉의 커피나무 대표 [1003]
    • 맛집탐방
    2016-12-22
  • 손 끝에서 피어나는 앙금꽃 한송이
    식문화가 서구화되면서 디저트 문화가 한국에 전파되었다. 잔치가 파티가 되어버린 것이다. 파티 문화가 확산되면서 파티의 주인공 케이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새로운 케이크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1 케이크의 김태희 대표. 그는 ‘케이크는 빵이다’라는 공식을 깨고 떡으로 케이크를 만들고 팥 앙금으로 장식을 올린다. 그가 만든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는 맛도 일품이지만 섬세한 꽃장식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주간인물이 앙금 플라워 떡케이크의 새로운 도약을 따라가보았다._이효정 ­­기자 Q. 401 케이크. 이름이 특이하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A.저는 원래 미술 계통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생활이 무료하여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하고 싶어서 떡케이크 수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강하며 연습삼아 만든 떡케이크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것이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그 때 제가 사는 집 호수가 401호였습니다. Q. 앙금 플라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A.저는 원래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도 요리 잘 안하고 요리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죠. 그런데 앙금 플라워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다채로운 색감이 주는 압도적인 매력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색깔을 섞고 그것이 제 손 끝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너무 매력적입니다. 그렇게 앙금 플라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401 케이크가 가지는 타사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A.앙금꽃을 만들 때 디테일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색의 조화라던가 명암의 차이에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비주얼에 자신이 있습니다. 비주얼을 보고 앙금 떡케이크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의 이목을 더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색이 반복되면 단조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꽃의 ‘굴곡’과 같은 디테일이 더해지면 단조로움이 자연스러움으로 탈바꿈되는데 이것이 401이 가지는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가지는 교육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A.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창업을 목적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삶의 활력을 위해서 오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매일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새로운 취미를 개설하고자 하시는 분들인데요, 그런 분들이 자신의 손으로 예쁜 꽃을 만들고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모습이 매우 보기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오시는 분들이 삶에 활력을 찾아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에 참석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 A.앙금 플라워 떡케이크를 만드는 사람들을 플라워케이크 지도사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401 케이크는 지금처럼 원데이 클래스와 주문제작을 병행할 예정입니다. 또한 앙금플라워 떡케이크의 대중화에 앞장서기 위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늘리고 꽃 표현법이나 색깔 혹은 좀 더 맛있는 설기를 위한 레시피를 개발할 예정입니다. Q. 주간인물 독자들에게 한 마디. A.앙금플라워 떡케이크가 이제 조금씩 입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제가 있는 분야가 점점 인정을 받고 있는 추세라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혹시라도 앙금플라워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쯤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집-일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새로운 취미를 갖는다는 건 저의 세상을 더 넓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케이크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김태희 대표. 주간인물은 김태희 대표의 열정과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앞으로의 나날을 응원한다. PROFILE 現 401 앙금 플라워 대표 現 원데이 클래스 운영 [1003]
    • 문화
    2016-12-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