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08(월)
 


태극기 한복 모델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현전 대표

핑클, SES와 함께 국내 1세대 아이돌로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걸그룹 ‘베이비복스’
부산에서 모델로 활동하던 정현전, 정시운과 리드보컬을 맞은 차유미, 무용을 전공한 김이지, TV 공개방송을 구경하다 픽업된 이희진이 바로 1996년에 결성된 베이비복스의 1기멤버들이다. 이들은 3년 여 간의 연습기간을 거쳐 1997년 정규 1집 'EQUALIZEHER'로 데뷔해 타이틀곡 <남자에게(민주주의)>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베이비복스는 2004년까지 한국에서 총 8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아이돌 1세대 중 디바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정규 앨범을 발표한 그룹으로 보컬, 댄스, 랩파트를 각각 맡는 21세기 현재 완성형 아이돌 구성을 갖춘 유일한 그룹이라고 평가받아오고 있다.
그중 1기 리더를 맡으며 맡언니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정현전씨를 만났다.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 자신이 좋아하던 '요리' 솜씨를 맘껏 펼치며 유명 맛집 대표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해본다. _박정호 기자


Q>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 출연 이후 더 많은 관심을 받고 계십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코로나19로 인해 다들 힘든 시기지요. 저 역시 방역에 신경을 많이 쓰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제가 운영하는 '초함'은 오픈형 식당이 아니라 룸으로 이루어져 있어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주고 계십니다. 방 크기도 다양해서 가족, 친구, 동호회, 회식 등을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인데 지금 시기에 맞아떨아졌어요. 하지만 그래도 작년엔 여파가 있어 자연스레 여유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동안 메뉴 개발에 전념했습니다. 외식경영에도 관심이 생겨 외식경영학 박사과정 수업도 들으면서 나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Q> 데뷔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학교에서 '벙어리'냐고 할 정도로 말이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친한 친구들은 항상 발랄한 성격들이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장래 희망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으니 말 다했죠. 요리하는 걸 좋아해 늘 '큰 냉장고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몸이 아파 병원에 다닐 땐 간호사가 될까 하기도 했는데 그때 TV에서 전인화 선배님이 장희빈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연기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모두에게 “영화배우가 되어서 여러분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의외로 당돌한 면도 있었나봐요.


Q> 처음 캐스팅 당시를 회상해본다면.

광안리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받았어요. 학생 때 당시 잡지나 CF에도 간간히 출연하고 있었는데 매니저 분이 당시에 주신 명함이 제 눈엔 허술해 보여 버렸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나중에 알고 있던 작가분이 연락오셔서 그 매니저분에 대해 확신을 주신 바람에 다시 인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면접에서 “뭐가 제일 하고 싶냐”라고 물어보기에 “연기자요”라고 답했어요. 그러니 흔쾌히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토요일 토요일 밤에’와 단막극 등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니까 너무 즐겁더라구요. 그러다 매니저님이 “연기는 나중에 하고 내가 가수 매니저니까 가수에 도전해보는 건 어때?”라고 물어보시기에 뜻에 따라 가수 연습생이 되기로 했죠. 멤버가 몇 번씩 바뀌는 치열했던 연습생 시절을 보냈었지요.

Q> 베이비복스 활동 당시는 어땠나요?

항상 젝스키스 뒤의 순서로 나갔으니까 격렬한 춤이 많아 부상을 많이 입었죠. 멤버 중 차유미는 부상으로 인해 무릎에 물이 차 탈퇴하기도 했구요. 그 와중에도 마냥 즐거웠어요. 저는 항상 꿈에 가득 차 있었죠. 무대를 하나 만드는 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컨셉을 어떻게 잡을지 매일 연습하며 구상했어요.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면서 완성된 무대가 엎어질 때도 있었지만 저는 마냥 행복했어요. 당시 3사 방송에 나오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았던 시절에 사장님을 잘 만나서 7월부터 12월까지 47회를 출연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일정을 소화하려 심야 고속버스를 타는 날이 참 많았는데 텅 빈 고속도로의 가로등 불빛과 버스의 불빛이 막힘없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걸 즐겼어요.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의 미래도 불빛처럼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았죠.

행복했던 날들이었지만 저도 활동을 길게 하진 않았습니다. 연예계를 직접 경험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꿈을 높이 잡아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때의 저는 다른 목표가 없었고 ‘연예인’이 되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보면 제가 끈기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리더로서 힘들었던 일들이 많았어요. 팀을 컨트롤 해야 했고 총대를 메야 했던 일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둔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Q>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항상 감사했던 게 무대에 설 때마다 관객분들께서 ‘젝스키스 보고 베이비복스 보고 가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1집 '남자에게’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나레이션이 엄청 파격적이어서 그런지 인기가 상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활동 시기가 IMF와 겹쳐 앨범도 많이 팔리지도 많았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려웠지만 하루에 스케줄이 11개를 소화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차를 타고 방송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공연하기 위해서 전국을 많이 돌아다녔어요. 제주에서 강원도로 갔던 기억도 나네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아서 감사한 기억뿐이에요.

Q> 탈퇴 이후 공백기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다시 연기연습도 하고 다른 R&B팀 연습도 하며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그때는 또 뭘 해도 안 됐어요. 팀을 모아도 해체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때와 기회는 늘 오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죠. 10년 정도 서울 생활을 하다가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친구들이 오면 항상 초읍에 '초함'이라고 제가 좋아했던 가게에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인연이었는지 어머니께서 건물을 구입하시고 덥썩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힘들어서 울기도 했는데 벌써 5년 차네요. 어릴적부터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걸 좋아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손님들이 제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셔서 늘 감사하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외식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초함만 성장하는 게 아니라 초함이 자리한 부산 초읍 지역도 함께 살아날 것이라는 목표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Q>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으신 말씀.

그래도 어릴적 꿈이 현모양처였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웃음).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 낳고 서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과 살아보고 싶어요. 사람 마음 중 가장 좋은 마음이 사랑(愛)이라잖아요. 사람들이 ‘내 가족도 소중하지만 타인도 남의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조금 더 생각을 열어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그냥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넘겼으면 좋겠어요. 지금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서로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고 있잖아요. 나중에 마스크를 벗을 때가 곧 올 테니까 그때까지 서로 마음속에 ‘사랑 愛’를 많이 새겨두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 대표는 인터뷰 내내 여전히 도시적이고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꾸밈없는 털털한 모습으로 반전 매력을 드러냈다. 그녀가 운영 중인 '초함' 역시 마찬가지. 빼곡한 건물들 사이 시골 느낌의 정겨운 흙집의 모습을 한 '초함'은 투박하지만 정겹고 세련되진 않지만 편안한 곳이다. 푸짐하기만 한 밥상은 차리기 쉽지만, 품격있으면서도 깔끔한 한식 테이블은 이외로 어렵고 낯선 법. 이곳에서 나오는 한식의 맛과 멋을 살린 차림새는 예사롭지 않다.

"한식이라고 해서 전통만을 고집하면 자칫 올드한 테이블이 될 수 있어요. 심플하면서 간결한 그릇과 음식이 돋보이는 담음새가 중요하죠."

주인장의 따뜻한 감성이 깃든 '초함'이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길 기대해본다. [1113]


주간인물(weeklypeople)-박정호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베이비복스 1기 리더 정현전, 부산 유명 맛집 '초함' 대표로 제2의 인생 펼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